故 김남수 씨는 일본인과 중국인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자로 무기수였다.
그러나 따뜻한 양심을 가진 동포사회의 구명운동으로 1993년 3월에 특별사면 했다. 고인의 살인행위는 1968년도 일본에서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일본인을 살해하고 30년째 복역하다가 구명운동으로 석방된 재일 동포 권희로의 경우와 같았다. 고인은 정말 제2의 권희로 이었는가?
故 김남수씨는 두 사람은 우리 한인 동포가 아니었다. 살인동기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우리 한국인을 깔보고 무시한다는 차별때문이였다. ‘죄는 밉지만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라면 그는비록 살인은 했지만 역사는 민족주의자로 기록할 것인가?
고인은 1933년 5월15일 강원도 고성군 고성 읍에서 2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때 국군에게 인민군으로 오인되어 잡혔을 때가 빡빡 머리 중학교 3학년생인 17살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포로 석방 때 인도를 거쳐 브라질로 왔다. 몇 년 뒤 리베르다지 지역에 있는 일본식당에서 자신을 '조센징'이라는 일본인을 살해 하고 첫 번째 수감 되었다. 그리고 한인교회의 구명운동으로 1975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후 다시 중국인을 권총으로 두 번째로 살해하고 무기수가 되어 27년간 정신감호소에 수감되었다. 이 소식이 1993년 6월 MBC TV의 기획특집 '76인의 포로들' 에 방송되자 당시 토요신문 창간 1주년 특별사업으로 펼쳐진 구명운동추진 위원회(위원장 심상태. 토요신문사 고문겸 재향군인회 브라질 지회장)에 의해 특별 사면으로 출소했다.
석방 조건은 대한민국 정부(총영사관)이 신변을 인수하고 출소 12시간 안에 브라질 영토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출소한 당일 저녁에 브라질 한인 천주교회(김동억 주임신부)에서 김남수 영주귀국 송별미사를 드렸다. 이때 글쓴이가 강단에 올라서 구명에 협조 하여준 동포사회에 감사드린다는 인사말도 있었다.
김남수 氏는 김동억 신부가 직접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주선한 음성 꽃동네(당시 오웅진 신부)로 보내질 때 대한항공사에서 항공권을 제공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국내 언론사 취재진들이 물려들었다. 바로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뵙고 로얄호텔에서 글쓴이와 같은 방에서 한국의 첫날 밤을 보낼때 감격한 고인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의 서울땅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긴밤을 뜬눈으로 눈물 짓든 모습이 지금도 선 하다.
이튼날 음성 꽃동네로 향했다. 지금도 꽃동네 기록에는 브라질에서 꽃 동네까지 인솔했던 글쓴이의 이름은 인계자로 남아있다.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인 故 김남수 氏는 음성 꽃동네 부랑인 요양원에서 22년간을 살다가 한(恨)도 많은 억울한 삶을 외롭게 마감했다. 늦게나마 故 김남수 氏를 기억하는 동포들과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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